마라톤 첫 풀코스 2편_ 그놈의 자신감

마라톤 첫 풀코스 2편: 선입견, 페이스, 자만과 현실

 

 

I. 선입견

1. 화려한 복장, 그리고 작아지는 마음

우리 동호회 남자 회원들은, 모드리치님을 제외하면 저 포함 모두 꽝패션입니다(지송^^).
오로지 기능성, 그리고 중요한 신발 정도가 전부죠.

휴게소에서도 러너 몇분을 보고 이미 약간 기가 죽었는데,
대회장에 도착하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공주 마라톤

  • 각양각색의 화려한 신발
  • 전문가처럼 보이는 테이핑
  • 선글라스와 멋진 모자까지

‘아… 다들 장난 아니네. 전문가가 이렇게 많은 거야?’

그렇게 기가 죽어 있을 무렵, 하늘님께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냥 보면 엄청 잘 달릴 것 같죠? 근데 다 비슷비슷해요.”

이번 대회 처음으로 다른 사람 배번호를 의식하게 되더군요. 풀코스인지 아닌지?.

혼자만의 달리기인데도,
남과 비교하는 습관은, 참,,,  

2. 학익진만 펼칠 줄 알았는데…

운동장을 나가려는데,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친구 둘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대회장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대회가 처음이라서요.”
“저도 잘… 잠시만요.”

회장님께 여쭤보고 알려주고 있는데,
언제나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화이팅!”을 외치시는 회장님께서
역시 좋은 오지랖을 시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얼마나 뛰어요?”
“저희 풀코스 신청했습니다.”
“목표는 어떻게 돼요?”
“4시간 안에 들어오는 게 목표예요.”
“1주일에 얼마나 뛰었어요?”
“300km 조금 넘게 뛰었습니다.”

300km.
순간 그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더군요.

무릎에는 보호대, 짧은 바지,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잘 갖춰진 복장.
요즘 젊은 친구들 대부분, 러닝 크루에서 학익진만 펼칠 줄 알았는데

젊은 나이임에도 훈련에  진심인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II. “네~ 먼저 가세요~ 다 재껴 드릴게요!”

1. 진지함과 낭만 사이

장거리 달리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지금 아무리 편해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들뜬 기분과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눌러야 하는 초반입니다.

뒤에서 누가 저를 추월하든,
앞사람이 아무리 빨리 시야에서 사라지든,
기계처럼 템포를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 구간 2km: 5분 47초
  • 구간 3km: 5분 46초
  • 구간 7km: 5분 47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앞질러 가니,
‘혹시 6분 후반대로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스마트워치를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페이스를 확인하고 안심이 되면, 마치 

‘나 지금 힘 여유 많은데, 나중을 위해 천천히 달리고 있는 거야.’

뒤에서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기를 바라듯,
고개를 돌려 강도 보고, 하늘도 보고,
몸짓으로 여유를 표현해 봅니다.

좋은 컨디션, 아름다운 하늘,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귀를 채우는 음악까지.
입가에는 어느새

“씨익~”

러너스 하이까지는 아니지만,
달릴 때마다 가끔 찾아오는 그 좋은 느낌.
그 순간만큼은 참 행복했습니다.

 

2. 들썩이는 엉덩이

하지만 8km 지점에서 슬슬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10km까지만 이 페이스 유지하고, 그다음에 올려야 하나?’
‘하프까지는 이대로 가고, 그 뒤에 올려야 하나?’
‘아무래도 4시간 안에 들어오려면 5분 47초는 부족한데…’

처음 뛰는 풀코스라면
보수적으로 하프까지 이 상태를 유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들뜬 엉덩이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 자만이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547은 부족하잖아… 좀 더 올려야지.’
‘10km야 빨리 끝나라, 이제 재껴 드릴게…’

그렇게 저는 페이스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3. 무거워지는 엉덩이와 도망간 자만

페이스를 조금 올리고 달리기 시작하자
자만이 제 옆에서 한마디 했습니다.

“어때, 기분 끝내주지? 한두 명 재치고, 고수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재쳤잖아.
내 말 듣길 잘했지?”

그렇게 자만을 벗 삼아 18km 정도를 갔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들썩이던 엉덩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엉덩이가 아니었습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둘 다 참 매정하더군요.
역시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찾아오는 그 감정,

‘반환점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인터벌 8회에서 4회만 끝내도 힘들지만,
그래도 마지막 4회를 버틸 수 있다는 오기가 있습니다.
LSD 34km도 반환점이 멀게 느껴지지만,
중간 중간 쉬는 타임과 앉아서 먹는 음료수가 있죠.

하지만 풀코스는 다릅니다.
반환점에 도착해도, 그 뒤에 21km라는 어마 무시한 녀석
떡 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은 푸르든 말든,
햇빛은 왜 이렇게 강하게만 내리쬐는지,
가끔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은 왜 계속 불어주지 않는지.

초반에 좌우를 둘러보며 여유를 뽐내던 고개는
이제 키로 수 안내판만 찾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심쿵하던 음악은 귀에 닿자마자 유턴해 버립니다.

하늘에 흐르던 음악은,
그냥 조금만 천천히 사라져도 좋으련만,
정적과 인내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 아 그냥 초반 페이스 그대로 유지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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