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굽고 병원 픽업하고… 그래도 수요일은 달린다
I. 수요일은
4시 30분.
갑자기 집안이 분주해집니다.
‘설거지하고, 빨래 개고 널고… 둘째는 삼겹살 구워주면 될 것 같고, 첫째는 뭘 해줘야 하지?
둘이 왜 이렇게 식성이 다른지… 아, 계란말이나 해보자.’
일찍 퇴근하면 괜히 찜찜해서
사무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문을 닫습니다.
가장 오래 걸리는 빨래부터 돌리고,
놀고 있는 둘째 방을 엽니다.
아들놈과의 대화는 항상 Yes or No입니다.
"대현아, 삼겹살 먹을 거야?"
"…어."
"많이?"
"…적당히."
"지금?"
"어."
그렇게 삼겹살 네 줄을 올려놓고
유튜브에 ‘계란말이’를 검색합니다.
역시 백종원 영상.
"대현아 먹어!"
"계란말이는 왜? 형?"
"어."
계란말이를 만들다가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 보여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삼겹살을 집었는데,
둘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알았어, 안 먹을게! 부족해?"
"…아니야…"
계란말이를 접시에 놓고
‘이제 빨래만 널면 되겠네’ 싶어 첫째 방문을 엽니다.
"진유야, 계란말이 있고 이따 엄마 오면 김치찌개 끓여달라 해."
"아빠, 나 병원 데려다 줘야 해."
"어? (예상치 못한 복병…) 아빠 오늘 운동 가야 되는데…"
"…알았어."
문을 닫고 빨래를 개려는데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아빠 빨래만 널고 바로 병원 가자."
그렇게 마지막 미션인 ‘병원 픽업’까지 끝내려는 순간,
와이프에게 전화가 옵니다.
"짐 전철 타. 배고파!!"
"나 오늘 운동 가야 되는데…"
"다쳤는데 어디를 가?"
"천천히 걸을 거야. 참, 대현이는 삼겹살 먹였고, 진유는 계란말이 준비해놨어.
빨래도 덜 마른 거 빼고 개놨고, 검은 빨래는 돌려서 널어놨고…"
구두로 일일 보고를 마칩니다.
"알았어. 나 범계에서 뭐 좀 먹고 갈게."
"참, 나 운동 끝나고 저녁 먹고 갈게."
"오늘도 꽐라 돼서 오냐?"
"아니야…"
잠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늦더라도 진심 어린 허락을 받을 것인가?’
‘운동 후 술자리에서 와이프의 묵직한 전화 한 통을 감내할 것인가?’
"진유 병원 데려다 주고 범계역으로 갈게. 우리 같이 먹자."
"됐어. 너 운동 끝나고 먹는다며."
"아니야, 나도 배고파. 나도 뭐 좀 먹고 가야지!"
(진심을 담아 말합니다.)
"…알았어 그럼 ^^"
이렇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킨 뒤 배까지 든든히 채우고
자유공원에 도착합니다.
II. 체력을 위해
‘모드리치님도 안 오고 꼬미노님도 안 오는데… 왜 이렇게 많지?
다른 동호회랑 같이 뛰나?’
평중마 지박령 선배님들도 계시고,
지난주에 이어 참여하신 마초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 모닝빵님,
다크호스 주봉 형님,
그리고 혼자 묵묵히 달리고 계시는 동진 씨.
1) 간만에 뵙는 모닝빵님
다쳐서 한 바퀴만 걷고 주차장에서 푸시업을 하고 있는데
모닝빵님이 오십니다.
"모닝빵님, 너무 간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근데 살이 조금 찌신 것 같은데…?"
밥을 너무 많이 먹었더니
근육 하나 없는 뱃살이 툭 튀어나옵니다.
"밥을 많이 먹어서… 잘 지내셨어요?"
"그냥 뭐… 운동을 너무 안 하니까 체력도 떨어지고,
체력이 없으니 놀지도 못하고… 그래서 다시 뛰려고요."
"맞아요. 전 피곤하면 주변에 짜증을 내서…
가족한테 잘하려면 체력도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2) 동호회 들기 전 달리기 루틴
가을이 오면 기분 좋게 자주 뛰고,
그 탄력이 겨울 초입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추워지는 어느 겨울날.
‘오늘 나가면 얼굴 다 기스나겠다.
달릴 날씨는 아니지. 사실 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쉬는 거야.’
스스로에게 ‘천재지변으로 인한 운항 취소’ 같은
강력한 합리화를 해줍니다.
그 하루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헬스장 러닝머신?’은 지루함 때문에 점점 멀어지고,
그러다 봄바람이 불면
다시 뛰기 시작하고 루틴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6월.
‘왜 벌써 이렇게 더워?’
‘비가 오네, 못 뛰겠다.’
여름은 핑곗거리가 참 많습니다.
돌아보면,
‘나는 1년 내내 달린다…’라고 착각했을 뿐
실제로는 많이 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달리기 = 건강이었지,
달리기 = 체력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3) 작년 겨울부터
20년 직장 생활을 접고 처음으로 개인 사업을 고민했습니다.
리스크를 싫어해 정년까지 갈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전쟁터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사업 관련 영상들을 보다가 들은 말.
“9가지를 잘해도, 1가지가 부족하면
전체 템포는 결국 부족한 그 1가지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 1가지는 ‘체력’이었습니다.
겨울에 손·얼굴만 잘 가리면 1~2km 뛰어도 춥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처음 동호회(평중마)에 들어 32km 대회까지 등록하면서,
주말마다 20km 이상, 바라산도 가고,
회장님·마초님·고문님과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봄이 오고,
마라톤이 ‘대회’가 아니라 ‘축제’라는 걸 알게 되면서
혼자 뛰어도 10km 이상이 자연스러워졌고,
동호회 분들과 달리는 시간이 점점 소중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름.
땡볕을 피해 아침 런, 둘레길 런, 우중런,
그리고 삼막사 계곡에 풍덩!
그날 이후 달리기에는
“크~~ 시원한 맥주 한 잔 + 이야기꽃”
이라는 새로운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가을이 된 지금,
드디어 1년 꾸준히 달린 첫해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체력은?
몇 달 꾸준히 달리던 어느 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AS하다가 포기하고 싶더라.
해도 해도 해결이 안 돼서 속 타고 밥도 안 넘어가고…
근데 8시간 내내 서서 일했는데 허리도 안 아프고 잠깐도 안 쉬었더라니까?"
"고생했네…"
"그러니까 체력이 붙긴 붙었나 봐."
III. 평중마 지박령
동호회라는 게 참 조심스럽습니다.
아내 직장에도 산악·마라톤 하시는 분이 계신데,
예전에 그러더군요.
"저희 남편은 달리기만 하고 바로 들어오던데요."
"어?? 마라톤 동호회가 그럴 순 없는데…"
그리고 한 달 전쯤.
"아니 그렇게 술 마실 거면 뭐하러 뛰어요?"
"에이, 그거 마시려고 뛰는 건데요. 이제 동호회 같네요."
저에게 그 분수령은
동호회 가입 8개월 후 맞이한 삼막사 계곡이었습니다.
평일 저녁 모임은 아내에게 모든 짐이 갈까 봐 잘 못 갔고,
운동 후 술까지 마시고 들어가는 게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습니다.
근데 그날, 더위에 탈탈 털린 상태로 계곡에 들어가니…
그 기분이란, 그냥 끝내줬습니다.
그냥 가기 아쉬웠고,
목이 탈 정도로 시원한 맥주가 생각났습니다.
쭈뼛거리고 있을 때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팀, 오늘 맥주 한잔 하실래요?
가볍게 한두 잔만 하다 갈 건데…"
그렇게 고문님·하늘님·회장님,
평중마 지박령 3인방과 첫 술자리를 했습니다.
가끔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고,
속상해서 동료와 한잔하고 또 일 얘기하고,
그러고 다음 날 다시 같은 일만 반복하기보다,
가끔 다른 삶을 사는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드리면—
지박령 세 분은
육체가 아닌 ‘혼’으로 우리 주변에 맴도는 존재라,
저처럼 때가 되어 혼이 보일 때,
그리고 간절히 보고 싶을 때,
맥주와 함께 나타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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