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SD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I. 주제 파악

동호회 들어가기 전, 혼자 뛰던 시절에는 아내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냥 천천히 뛰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날 추월하는 거야. 갑자기 전투력 올라가서 끝까지 쫓아갔더니 너무 힘들더라고.”
“안양천에서 내가 제일 빠른 것 같아. 뭐, 마라토너처럼 보이는 사람들 빼고.”

그땐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동호회에서 선배님들과 같이 뛰고, 첫 마라톤 대회를 다녀온 뒤엔 이런 말들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제 파악’, 자기 객관화가 되더군요.

II. 어제의 나

마라톤을 하면 ‘남들보다 더 잘 달려보겠다’는 마음은 금방 사라집니다.
막상 뛰어 보면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되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준이 바뀝니다.
남이 아니라, 어제의 나.

그런데 이 ‘어제의 나’도 굉장히 어려운 상대입니다. 하루 이틀 방심하면 금세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멀어져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 비슷해지고, 정말 열심히 해야 겨우 앞서갑니다.
그러다 잠깐 게을러지면 또 ‘어제의 나’에게 추월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실천하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라.”

III. LSD — 나와 마주하는 시간

LSD(Long Slow Distance)는 남과의 경쟁이 사라지고, 오롯이 나와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초반엔 가볍고 여유롭지만 15km가 넘어가면 몸의 진짜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호흡은 괜찮은데 심박은 올라가 있고, 다리는 무거워지고, 마음은 흔들립니다.

그때부터 ‘나’와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이 페이스 유지할 수 있을까?”
“반환점까지만 가 보자.”
“아직 멀었네 그래도 가자.”

LSD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너 지금 어떤 상태야? 어디까지 갈 수 있어?”

그래서 장거리를 뛰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나를 넘어서는 건 결국 나뿐이라는 사실을.

IV. 결론 — 달리기는 ‘나’를 키우는 일

달리기를 오래 하다 보면 삶에서 배웠어야 할 것들을 도로 위에서 배우게 됩니다.

남을 의식하며 달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남는 건 단 하나였습니다.
내가 어제보다 나아졌는가.

달리기는 세상과 달리 정직합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운도 필요 없고, 라인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쌓은 만큼,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오늘도 달리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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